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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 우리는 어떤 기억을 반복하고, 어떤 기억을 생략하는가
기억은 항상 전체가 아니다.
우리가 어떤 순간을 기억한다고 말할 때,
그건 실제로 일어난 사건 전체가 아니라
반복해서 떠오른 조각들 혹은
의식적으로 지워버린 공백들이다.
영화는 이 기억의 작동 방식을 편집을 통해 시각화한다.
그리고 그 핵심엔 두 가지 기법이 있다.
- 반복(repetition): 감정을 각인시키고,
- 생략(ellipsis): 의도를 감추거나 상상하게 한다.
특히 1990년대는 세계 영화가
트라우마, 상실, 정체성 혼란과 같은 감정들을 다룰 때
기억의 서사구조를 반복과 생략이라는 편집 언어로 구현했던 시기다.
이 글에서는 다양한 국가의 영화를 예시로
반복과 생략이 어떻게 기억을 재현하고, 감정을 설계하며,
관객의 해석을 유도하는지를 미디어리터러시 관점에서 분석한다.
2. 반복: 감정의 각인과 기억의 덫
2-1. 반복의 유형
- 서사 반복: 같은 사건이 시간차를 두고 여러 번 등장
- 이미지 반복: 동일한 시각 이미지의 재사용
- 음성 반복: 동일 대사, 사운드 효과의 재등장
- 구도 반복: 프레임, 배치, 색감의 구조화된 재사용
2-2. 반복은 왜 강력한가?
- 인간은 같은 자극의 반복에 익숙해지기보다는
때때로 감정적으로 더 예민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 영화 속 반복은
인물의 집착, 회상, 상처, 죄의식을 관객이 체험하게 만든다.
3. 반복을 활용한 영화 사례 – 세계 각국
3-1. 《박하사탕》(1999, 한국)
- “나, 돌아갈래!”라는 대사와 함께 반복되는 기차 레일 장면
→ 주인공의 내면 트라우마와 도달할 수 없는 과거를 반복적으로 각인
3-2. 《메멘토》(2000, 미국, 크리스토퍼 놀란)
- 주인공의 단기 기억 상실증을 반영하여
같은 사건이 다른 시점에서 반복 재구성
→ 반복이 단지 설명이 아닌
기억의 단편성과 왜곡성 자체를 형상화
3-3. 《러브레터》(1995, 일본, 이와이 순지)
- 편지 쓰는 행위와 “오겡끼데스까?”라는 문장이 반복됨
→ 기억은 언어로 호출되며,
반복은 결국 망각과 애도의 과정이 된다.
3-4. 《로제타》(1999, 벨기에, 다르덴 형제)
- 로제타가 일자리를 찾아다니는 장면이 반복됨
→ 단순한 ‘루틴’이 아닌
빈곤, 소외, 절망이라는 감정을 반복해서 주입
3-5. 《체리향기》(1997, 이란,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 자살을 결심한 남자가 여러 사람을 찾아가 말을 건네는 동일한 구조의 반복
→ 하지만 인물의 반응이 다르고, 카메라는 같은 구조를 다른 감정으로 갱신
4. 생략: 기억의 공백과 서사의 추적
4-1. 생략의 유형
- 시간 생략: 몇 시간, 며칠, 몇 년이 중간 없이 건너뛰어짐
- 행동 생략: 중요한 행위 자체가 보여지지 않음
- 심리 생략: 인물의 내면을 직접 보여주지 않음
- 결말 생략: 클라이맥스를 의도적으로 비워둠
4-2. 생략은 어떻게 감정을 발생시키는가?
- 생략은 관객이 스스로 기억의 틈을 채우도록 유도한다.
- 이는 수동적 감상이 아닌
능동적 해석과 감정 몰입을 유발하는 장치가 된다.
5. 생략을 활용한 영화 사례 – 다양한 문화권
5-1. 《초록물고기》(1997, 한국)
- 막동의 죽음 장면은 직접 보여지지 않고,
그 직전의 대화와 이후 장례식 장면으로 생략된다.
→ 생략이 더 큰 충격과 감정적 공백을 만들어냄
5-2. 《잉글리쉬 페이션트》(1996, 미국)
- 연인과의 관계, 사고, 전쟁의 일부 결정적 사건은
플래시백 중간에 생략되며 감정이 전면에 부각됨
5-3. 《슬로우 웨스트》(2015, 뉴질랜드/영국 합작)
- 총격전과 죽음의 장면을 생략하거나 간접 처리
→ 전통적인 서부극의 문법을 비트는 동시에
감정에 더 깊이 집중하도록 편집 구조 설계
5-4. 《하나와 앨리스》(2004, 일본)
- 주요 고백 장면이 누락되어 있으며,
오히려 사소한 일상 장면들이 길게 이어짐
→ 감정의 흐름은 사건이 아닌 상황의 누적으로 전개됨
5-5. 《영화는 영화다》(2008, 한국)
- 극 중 촬영 장면과 실제 사건의 구분이 없고,
클라이맥스 결말이 명확히 보여지지 않음
→ 관객 스스로 기억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게 만드는 생략 효과
6. 반복과 생략이 함께 작동하는 순간
6-1. 《이터널 선샤인》(2004, 프랑스·미국)
- 기억 삭제 과정을 따라가며
**사라지는 기억(생략)**과
반복되는 과거 장면이 병치됨
→ 감정과 기억이 뒤섞인 몽환적 리듬 구조
6-2.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2011, 이란)
- 중요한 ‘폭행 사건’의 결정적 순간이 생략되면서
인물들의 진술 속에서 반복적으로 언급
→ 관객은 반복과 생략 사이의 긴장 속에서
기억과 진실의 균열을 경험하게 됨
7. 미장센과의 결합: 반복적 소도구, 생략된 공간
- 소품 반복: 인물의 심리적 고정점
예: 반복해서 등장하는 박하사탕, 카메라, 전화기 - 장소 반복: 기억이 얽힌 공간의 재등장
예: 동일한 기찻길, 버스 창가, 같은 병원 복도 - 공간 생략: 특정 장소를 보이지 않음으로써
감정이나 기억을 더 크게 확대
8. 미디어리터러시 관점에서 읽기
8-1. 분석 질문
- 어떤 장면이 반복되고, 그것은 감정을 어떻게 만들었는가?
- 무엇이 생략되었고, 그 공백은 어떤 상상을 유도하는가?
- 반복이 피로감인지, 감정의 진폭인지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 생략된 사건이 직접 보여졌다면, 감정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8-2. 관객의 역할: 빈칸 채우기 vs 조각 맞추기
- 반복은 조각의 강조이고,
- 생략은 빈칸의 요청이다.
→ 관객은 조각을 연결하거나, 빈칸을 채우며
능동적으로 감정의 리듬을 구성하게 된다.
9. 결론 – 기억은 ‘편집된 감정’이다.
90년대 영화는 기억을 서사의 배경이 아니라
영화의 형식과 구조 자체로 삼았다.
- 반복은 감정의 되감기이며,
- 생략은 감정의 망각 혹은 정지다.
이 두 편집 언어는 감정을 만들고,
그 감정은 관객에게 단순한 정보가 아닌 내면의 리듬으로 남는다.
영화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기억처럼 말한다.
반복하고, 생략하고, 왜곡하고, 잊는 방식으로.
그리고 그 방식은 당신의 감정을 설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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